校註景岳全書 序文
아득한 옛날 炎帝 神農氏는 本草의 性味와 醫治的 效能을 규명하여 ≪神農本草經≫을 저술하였고, 뒤이어 黃帝 軒轅氏는 岐伯 등 六臣들과
더불어 醫學을 講論하여 ≪黃帝內經≫을 저술하였으니 비로소 炎黃兩帝가 인간의 生生之道인 醫藥의 濫觴이 되는 것이다. 특히 ≪黃帝內經≫은
醫藥의 모든 理論을 包括하여 至精至微하면서도 整然하여, 인류 역사상 반만년 이래로 醫藥原論의 準繩으로 尊崇되고 있는 寶筏이다. 그리고
後漢時代의 長沙太守 張仲景은 ≪傷寒論≫과 ≪金匱要略≫을 저술하면서 漢醫藥史上 처음으로 二種 이상의 藥材를 配合하여 處方을
구성함으로써 千病萬證의 治療에 크게 기여하였으니, 이는 곧 炎黃兩帝의 醫論을 融合하여 人類醫療를 한 단계 發展시키는 巨步를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黃帝內經≫이후로 최고의 學問을 定立하게 되었고, 그 뒤 隋・唐이후 醫論을 敦篤하게 발전시키는데 공헌한 학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金・元시대에 이르러 劉河間이 諸病皆屬於火之論을 주장하더니, 補中益氣湯을 創方하고 脾胃論을 定立하여 溫補派의 主宗으로 인정받는 李東垣조차도 相火는
下焦包絡之火로서 元氣之賊이라고 주장하면서 火與元氣不兩立說을 提唱하였는가하면, 급기야 朱丹溪가 一水不勝二火之說 즉 腎中一水가 君相二火를 이길 수 없으며,
陽常有餘 陰常不足之說을 提起하면서 知栢等屬으로써 補陰한다고 역설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藜藿野人들은 抑陽助陰으로 眞陽을 戕伐당하여 夭殤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胡猜亂道가 沿襲成風되어 謬妄한 醫說을 群犬吠聲으로 黙黙承襲하니, 擧世矇矇하여 神農遺業에 魯莽滅裂의 弊端이 甚大하게 되었다.
이에 憤然이 일어나 金・元時代의 醫學的 弊端을 과감하게 匡正한 학자가 있으니 바로 景岳 張介賓이다. 神醫 景岳은 難得而易失者는 오직 陽氣이고 旣失而難復者는 역시
陽氣뿐이라고 주장하면서 命門火를 鞏固하게 하는데 注力하였으니, 즉 人體에서 陽은 生氣이고 陰은 死氣이기 때문에, 眞火는 곧 眞陽이고 元陽이며 眞氣이고 正氣요 元氣이며
生氣라고 闡明하여 前賢未發의 精微深奧한 理致를 開拓함으로써 漢醫學史上 하나의 劃然하고 巨大한 座標를 設定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眞陰을 配慮하여 以滋化源
하면서 相火를 至重하게 여겨, 均衡과 調和로서 陰陽을 俱全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인간이 保生化生할 수 있는 機轉이라는 것을 醫學史上 처음으로 명확하게 闡明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眞陽이 偏虛한 芻蕘庸衆들을 益火之法으로 調補하여 起死回生할 수 있게 한 奇績은 千歲를 두고 燦然하게 되었다.
이러한 張景岳의 醫論이 우리나라에 傳來되면서 周命新의 ≪醫門寶鑑≫, 惠庵 黃度淵의 ≪方藥合編≫, 東武 李濟馬의 ≪東醫壽世保元≫, 石谷 李圭晙의 ≪醫鑑重磨≫,
晴崗 金永勳의 ≪晴崗醫鑑≫ 등을 風靡하게 되었으며, 특히 趙憲泳의 ≪通俗漢醫學原論≫은 아예 ≪景岳全書≫의 紹介書이고 解說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近世 우리나라 醫學은 ≪景岳全書≫의 영향을 받지 않은 학자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距今 3백여 년, 本書 ≪景岳全書≫ 初版인 魯本이 康熙 39年(1700)에 출판된 이후 무려 40여 판이 續刊되기는 하였으나, 新版은 舊版의 誤謬를 대부분 踏襲하였을 뿐만
아니라 新誤를 增添함으로써 近世版本에는 많은 誤謬가 散在하고 있음을 目睹하게 된다. 그래서 뭇 版本을 精讀하면 四庫全書 王本 江本에서 많은 校訂을 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근래 宋本에서 가장 많은 校訂을 하였음을 把握할 수 있으나 그들도 적잖은 新誤를 범함으로써 ≪景岳全書≫를 考覽하여 好學精進하는 後學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淺學菲才인 愚瞽가 桑楡景迫한 중에 僭濫하게도 二十星霜 동안 不避煩勞하고 校訂之大役을 堪當하면서 專心費力하고 聚精會神하여 十餘版本을 精密하게 校勘하고,
200여 引用 醫籍을 일일이 校證하면서 難澁한 語彙들을 함께 註釋하였다. 그러나 識見이 卑淺한 筆力으로써 大全書의 完全無缺한 整理에는 부족함이 많아 隔靴搔癢을 금할 수 없었다.
오로지 뜻있는 後學이 있어 이러한 聾瞽之見을 바로잡아 주기를 懇切히 바랄뿐이다.
그리고 本書 執筆에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신 保健福祉部 韓醫學硏究院 愼賢揆 박사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많은 학문적 가르침과 격려를 아끼시지 않은 東國大學校
金基郁 學長님, 東方鍼灸社 空山居士 郭東烈 선생님께도 무한한 감사를 올린다. 그리고 후배 사랑하는 敦篤한 溫情으로 마지막 假本에서 全書를 精密 校閱하여 주신
大韓韓藥協會 元老學者 松汀 金教熙 선생님께도 이 지면을 통해 깊은 감사와 함께 絶倫하신 학문에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4대 家寶로 所藏한 袖珍本 ≪景岳全書≫를 校勘에
활용하도록 欣快히 貸與하여 주신 淸陽 李鍾琴 선생님의 敦厚한 情誼에 정중히 감사드린다. 또한 파일관리와 편집에 많은 도움을 주신 呂寅京 선생님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드리며,
古書 考覽에 도움을 주신 慶熙大學校 중앙도서관, 東國大學校 중앙도서관, 啓明大學校 동산도서관, 安東大學校 도서관 담당자들에게도 이 지면을 빌어 진정으로 감사드린다.
끝으로 杜塞撰著인 ≪校註景岳全書≫가 先學들의 遺志인 廣濟蒼生하는 仁心을 받들어 後學들에게 醫籍考覽에 다소나마 도움이 된다면 다시없는 榮光으로 생각하고,
天下人類가 拯濟無窮의 恩澤으로 駐顔長春하여 同躋壽域하기를 懇望하며 삼가 弁語하노라.
戊戌(2018) 菊秋大韓韓藥協會 學術委員長 杏林埜人 權三壽 謹識
校註景岳全書 跋辭
張景岳은 本名이 介賓이고, 字는 會稽 출신이라서 會卿이며, 號는 仲景을 尊師重傅로 推仰한다 하여 景岳이라 하였고 別號는 通一子인데, 明代 嘉靖 42年(1563年)에 出生하여,
崇禎 13年(1640年)에 卒하니 享年 78歲를 長壽한 醫學者로서 紹興 외곽의 會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지혜로워 배우고 독서하기를 즐겨하였으며, 특출한 사람들이나
뛰어난 선비 그리고 현인들이나 재능 있는 사람들과 師友를 넓혀 갔다. 京師에서 名醫 金夢石으로부터 醫術의 理論과 實技를 傳受하였으며, 아버지 張壽峰으로 부터도
≪黃帝內經≫을 배우고 익혔다. 따라서 稍長에서부터 醫學分野에 造詣가 깊었으며, 該博하고 精密한 高度의 醫療技能을 소유함으로써 能通能達한 醫家의 자질을 갖추게 되었다.
한편으로 諸子百家를 널리 탐독하고, 經書와 歷史에 깊이 通達하였으며, 先哲諸家들의 顯達한 文集에 이르기까지 博覽載籍하여 曲暢旁通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天文, 地理, 兵法, 易理, 術數, 音律 등에 대해서 能히 深奧함을 會通하였다.
晩年(대략 1636~1637年)에 餘生을 奮發하여 마침내 畢生의 學識과 經驗들을 기울여 ≪景岳全書≫64卷을 100萬餘字로 지었으니, 실로 先學들의 精義를 두루 採擇하고
心得한 前人未發의 玄微로움을 闡揚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內經≫의 醫學理論을 根幹으로 삼아 各論 冒頭에 ‘經義’를 第一題로 設定하였다. 그리고 ≪景岳全書≫의 八門 중
≪傷寒典≫은 당연히 ≪雜病謨≫에 合編되어야 하지만 仲景을 尊師重道로 尊崇하면서 仲景의 ≪傷寒典≫을 分離하여 門類를 八門으로 具色을 맞추는 絶妙한 體裁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특히 景岳 자신이 創方한 189方 중에서 상당수의 處方들은 深痼한 痼疾病에서 起死回生시킬 수 있는 不朽의 長桑禁方으로 자리매김하여 垂惠無窮하게 되었다.
그러나 책이 이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기 當代에 出版을 못하고 景岳은 世上을 떠났다. 그 뒤 4년 후에 明나라가 멸망함으로써 세상은 어지러워지고 어디에서도 財政的 支援을
받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에 더하여 흉년이 거듭됨으로써 모두가 塗炭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上梓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실로 哀惜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全書의 玉稿는
그의 외손자 林日蔚가 淸나라 康熙帝 39年(1700年)에 이르러 비로소 廣東布政使 謙庵 魯超의 도움으로 廣州에서 初版을 刊行하게 되니 이른바 魯本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실로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고, 渡世之津梁이요 濟衆之寶筏이며 長桑禁方같은 훌륭한 珍書가 하마터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는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외손자 林日蔚의 효성 덕분이었다. 저자인 景岳이 1640년에 捐世하고 꼭 60년 만인 1700년에야 비로소 출판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으니, 이는 곧 ≪褚氏遺書≫에 버금가는 일로서 感慨無量함을 금할 수 없다. 생각건대 60년이란 세월은 인간의 2세대를 훌쩍 지나는 기간이니 얼마나 긴 세월인가!
이 긴 세월을 이어준 사람은 오직 林日蔚와 魯超일 뿐이다. 이로써 우리 후세인에게 張景岳의 廣濟蒼生의 恩澤이 無窮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景岳一家의 世居地가 越나라 首都였던 紹興이었는데, 紹興에서 廣州까지 무려 1,488km나 되는 머나먼 길을 수레에 原稿를 싣고 가서 출판할 수 있게 한 외손자 林日蔚의
至高한 孝誠과 登梓를 위한 熱誠的 功績도 看過할 수 없는 일이며, 이는 濟世之慈航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온 세상 사람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게 출판한 廣東布政司
魯超와 함께 후세 인류 康寧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愚瞽는 不惑에 이르도록 懦弱하여 醫藥理論에 基礎가 부족함이 많았던 淺學菲才로서 桑楡暮景에 纔窺醫理하였으나 서둘러 精進하여 본서를 정리하게 됨에 識見과 能力의
한계에 逢着하여 隔靴爬癢을 금할 수 없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때마다 人能勝天이라는 張景岳의 遺訓과 他界하신 尹在昌 선생님의 跬步不休 跛鼈千里라는
座右銘을 본받아 愚公移山이나 磨杵成鍼하는 覺寤로 좌절하지 않고 다시금 奮發함으로써 全書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左右逢源으로 주위에서 指導하고
激勵하여 주신 분들의 後援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어찌 愚瞽 혼자만의 노력으로써 이러한 大業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회고하면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自古로 책을 校訂한다는 것은 먼지를 쓸어내는 것과 같아서 쓸고 나서 돌아서면 생기는 게 먼지(校書如掃塵 旋掃旋生)라고 하였거늘, 愚瞽도 한번 교정하는 데만 무려 6개월이
걸렸다. 이 힘든 校訂 작업을 八回를 反復하면서 제 自身이 精疲力竭되는 痛楚를 堪當해야만 했다. 이는 오로지 어느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순간순간의 休息으로
心身을 挽回하며 힘든 煩勞를 극복하고 切磋琢磨함으로써 全書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에 오로지 本書를 考覽하는 後學들은 이러한 聾瞽之愚衷을 헤아려 景岳의 醫論을 바르게 理解하고 廣布함과 동시에 濟世之津梁이요 馨香珍書인 ≪景岳全書≫의 保存이
千歲를 두고 陸續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時疫이 猖獗하는 渦中에도 불구하고 本書 梓行에 힘써주신 천광인쇄사 韓明勳 사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이에 삼가 跋한다.
戊戌(2018) 菊秋杏林埜人 權三壽 謹跋